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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둘레길/사찰(寺刹)

소요산 자재암

by @산들바람 2017. 10. 25.

자재암(自在庵)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

 

소요산에 자리한 자재암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광종 25년 (974년) 왕명으로 각규대서(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毅宗)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일부를 중건하였다.

 

그 뒤 조선(朝鮮) 고종(高宗) 9년(1872) 원공선사(元空禪師)와 제암화상이 퇴락(頹落)된 이 사찰을 44 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하였다. 순종 (純宗) 원년(1907) 정미의병(丁米義兵)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그 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 원래이름인 자재암(自在庵)으로 고치었다.

 

그러나 6.25 때 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에 대웅전을 1971년에 요사를, 1974년에는 포교당과 원효대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가 건립하였다. 최초의 창건자 원효대사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搖石公主)가 아들 설총(薛聰)을 데리고 와 머물렀다는 요석공주 궁지(宮地)와 사자암지, 소요 사지, 현암지, 원효 사지, 조선 태조 왕궁지가 있다고 하나 그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자재암-소개

△자재암의 연혁(沿革)

본 사찰은 신라 선덕여왕 14년(AD645) 경에 원효대사께서 개산(開山)하여 산이름을 소요(逍遙) 절이름을 자재암이라 하고 수행을 쌓던 도량(道場)이다.

 

그 후 고려 광종때와 조선조 고종 때에 각각 중창한 적이 있고, 이때에 사명이 영원사(靈源寺)로 개칭되었으나, 곧 다시 자재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6.25의 전란을 입어 지금의 건물들은 구후 복권된 것이며, 1981년 사찰경내에 있던 구 상가촌을 지금의 상가지역으로 이전시키고, 일주문을 신축하는 등 환경을 일신하여 청정한 수도 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위에는 요석 별궁지, 이태조행궁지, 원효대, 원효폭포, 백운선원, 옥로봉, 청량폭포나한대, 의상대, 선녀탕, 선녀폭포, 김송굴, 사자암지등이 있다.

 

일주문

△일주문 (一柱門) [소요산자재암((逍遙山自在庵) ]

우너효대사-원효굴

△원효굴

자재암-선방

△백운암(自在庵 白雲庵) 자재암(自在庵)의 선방(별원)

향토유적지-자재암

△ 자재암 (自在庵)

「향토유적 제8호」

 

소요산에 자리한 자재암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광종 25년 (974년) 왕명으로 각규대서(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毅宗)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채 일부를 중건하였다.

 

그 뒤 조선(朝鮮) 고종(高宗) 9년(1872) 원공선사(元空禪師)와 제암화상이 퇴락(頹落)된 이 사찰을 44 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하였다. 순종(純宗) 원년(1907) 정미의병(丁米義兵) 때는 이곳이 의병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그 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성파(性波) 스님이 복원, 원래이름인 자재암(自在庵)으로 고치었다.

 

그러나 6.25 때 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에 대웅전을>1971년에 요사를, 1974년에는 포교당과 원효대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가 건립하였다. 최초의 창건자 원효대사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搖石公主)가 아들 설총(薛聰)을 데리고 와 머물렀다는 요석공주 궁지(宮地)와 사자암지, 소요 사지, 현암지, 원효 사지, 조선 태조 왕궁지가 있다고 하나 그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요사채

△자재암 요사(自在庵 寮舍)

 

삼성각

△ 삼성각(三聖閣)

 

1909년 중창 때의 건물로 6.25 전쟁 중에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1914년 무렵에 그려진 칠성탱화만이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모셔져 있다.

 

나한전

△ 나한전(羅漢殿)

나한전도 현대에 세워진 것으로 16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샘물

△나한전(羅漢殿) 입구에 있는 샘물.

 

원효스님이 마셨다고 하는 샘물로, 최고의 차 맛을 내기로 유명하다. 원효대사(元曉大師)께서는 차(茶)의 달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사께서는 전국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절을 세웠다. 원효대사께서 자리를 잡은 곳이라면 필연적으로 명수(明水)가 나오는 자리이며, 찻물로는 으뜸인 석간수(石間水)가 솟아오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소요산 자재암의 원효샘은 1천3백 년 전 원효대사께서 이 물로 차를 달여 마시며 수행하던 곳이다. 찻물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수로 이름나있는 곳이다. 이곳은 신라 고려 때는 물론 조선중기 까지도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시대 시인인 백운 이규보가 이 물맛을 "젖같이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 했다. 자재암은 서울 근교에서는 손꼽히는 차 문화 유적지이기도 하다.

 

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보물 제1211호」

 

이 책은 당나라 현장 스님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仲希)가 지은『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것으로『반야심경소현정기』라 부르기도 한다. 목판에 새긴 후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세로 31㎝, 가로 19.1㎝의 크기로,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문화재로서 뿐만 아니라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반야심경약소언해본(般若心經略疎諺解本한문으로 된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가운데서 중요한 부분을 간추려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서, 자재암에 전래되어 오다 1994년에 보물>제1211호로 지정되었다.『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고 또 신봉되었던 대표적인 불경으로서 흔히『금강반야경또는 『금강경』이라고도 한다. 이 금강경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불교유입 초기에 전래되었으며,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 스님이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법(立法)을 위해 반드시 이경전을 읽게 한 뒤부터 널리 유통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자재암 소장의『금강경』언해본은 1464년(세조 10년) 간경도감에 의해 발간된 것으로서는 국내에 2점이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고, 나머지 1점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나, 자재암 소장의 『금강경』이 책 내용가운데 공신록(功臣錄)이 수록되어 있어 보다 완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역은 당시의 대학자인 한계희(韓繼禧, 1423~1482)가 했으며, 권말에는 그의 발문(跋問이 있고 책머리에는 서문 격인 진금강경심경전(進金剛經心經箋)이 있다.

 

보유문화재

동두천시 향토유적 제8호 『자재암(自在庵) 』보물 제1211호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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