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
국가보훈처 국가관리 기념관
2023.3.26일은 안중근의사의 순국 113주년 해입니다. 대한제국 말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준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영웅이셨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2010년 건립한 기념관으로 안중근의사의 단지 동맹을 상징하는 12 기둥 형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중근의사의 출생에서부터 순국하기까지의 전 생애를 전시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인중근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평화사상을 널리 선양하여,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고, 인류평화를 위한 소임을 다하고 있는 기념관 전시실을 소개해 봅니다.
B1 안중근의사 참배홀
B1 제1전시실
제1전시실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중국활동지도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안중근과 천주교, 을사늑약과 해외망명을 위한 중국방문 시찰, 1906년 평안남도에 설립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 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한 활발한 교육활동, 1907년 국제보상 관서 지부 설치등국제보생운동에 적극 참여한 활동사를 기록으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1879년 출생에서부터 1910년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의 일생
안중근 가족의 독립운동사
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
1889년 안태훈 진사와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등에서 영어 및 일본어를 배우고 1907년 3월 경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친 후 진남포 공립보통학교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9년 당시 평남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던 중, 그 해 10월 그의 친형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 사직한 후 형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여순(旅順)으로 갔습니다
안중근의사 친동생 안정근
1918년 11월 동삼성(東三省) 길림(吉林)에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던 대표 39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일제의 전제적 학대와 압박에서 벗어날 것을 선포하였으며,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상해(上海)에서 창당하여, 이사장으로 서병호(徐丙浩)를 추대하였고, 김구(金九)와 함께 이사에 피임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갑내기 사촌동생 안명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나, 7살이 되던 해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어린 시절 사촌형 안중근과 함께 성장하며 화서학파의 거유고능선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으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이 있은 후에,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안명근은 원대한 계획에 의한 독립운동을 추진, 매국노 이완용(李完用)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경근
으로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사람이다. 1918년 망명의 길을 떠나 사촌형 안중근 의사가 이미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박은식(朴殷植) 안정근(安定根) 신채호(申采浩) ;이범윤(李範允) 등 애국지사들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오촌 조카 안춘생
로 황해도 벽성군 금산면 냉정리에서 성장했다.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남경(南京)으로 가서, 1936년에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임관되어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 전에 참전하였습니다
1906년 평안남도에 설립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 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한 활발한 교육활동을 벌였습니다.
1F 제2전시실
1909년 2월 의군 재기를 도모하면서 연해주 연추 하리 마을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조직하여 왼쪽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고 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써서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2F 제2전시실 및, 기획전시실
1909년 9월 안중근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일본의 초대 총리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일로, 더구나 의군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 없이 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안중근의사가 사용한 권총 브라우닝 262336과 총알
아우들과 빌렘(홍석구) 신부를 만나 동포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있는 안중근 의사
보물제 569-16호
스스로 잘난척하는 것보다 외로운 것은 없다,라는 뜻으로, 평소 남에게 과시히지 않는 성품이 표현된 글귀
하늘을 공경함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장
백세에 걸쳐 부는 맑은 바람으로 풀이되는, 충절과 곧은 절개의 상징으로 안중근의사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 글귀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사형집행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셨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이후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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