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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둘레길/문화유산

한양 서쪽의 문 돈의문

by @산들바람 2020. 2. 1.

돈의문(敦義門)

조선 사대문 중 서쪽에 있는 문(門) 

2020.02.01일

 

서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서대문으로도 불리는 돈의문(敦義門)

 

안산자락 아래 조선시대 돈의문(敦義門)

 

 

 

일제에 의해 1915년 돈의문을 헐어 없애고 목재는 단돈 205원(쌀 17가마)에 경매로 팔아 버렸다.

 

숭례문과 동대문은 보존하면서 돈의문만 철거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 의주로와 연결되는 돈의문 밖의 교통량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엘리어스 버튼 홈즈

여행기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미국의 여행가이자 사진가였다. 그는 1901년 부산에서 인천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 곳곳을 여행하면서 귀중한 사진과 기록을 많이 남겼다.

 

 

일제 강점기때 경성시내를 달리던 전차

 

돈의문 주변 지역은 안으로는 한성부 서부 여경방, 인달방, 적선방 등이, 밖으로는 반송방, 반석방 등이 편제되었다. 이 주변에는 물이 맑고 경치가 수려하여, 한양에서 손꼽히는 명소였다.

 

 

돈의문 밖 일대는 행정구역상 한성부 서부 반송방에 해당 하였으며, 반송방은 주거여건이 좋았다. 의주나 마포로 가는 길목이며, 도성 규제에서도 벗어 날 수 있기에, 당대에는 명사 외에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조선시대 돈의문은 도성의 사대문으로 철저한 규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밤 10경시경 종이 28번 울리면 문을 닫았고, 새백 4시경 종이 33번 울리면 문이 열리면서 한양의 하루가 시작 되었다. 성문을 열때는 부험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돈의문

 

1396년(태조 5년) 한양도성이 1차 완공되었을 때, 서쪽 문에는 유교의 오상에 따라 돈의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돈의문 안쪽 동네를 새문안골로 불렀다, 세월이 흘러 돈의문 주변의 교통량이 폭증하자 한양의 사대문중 유일하게 1915년 일제에 의해 돈의문을 철거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돈의문을 열때 사용한 부험

 

경국대전

 

서궐 경희궁(慶熈宮)   

 

 

고종 때부터 경희궁은 많은 수난을 겪었다. 전각을 헐어 경복궁 중건의 건축 자재로 사용했고, 일제 때에는 일본인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궁의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돈의문에 인접한 경희궁(慶煕宮)

 

경희궁의 흔적 인 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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