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昌慶宮)
본래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었으나, 1483년에 성종이 3명 의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 다시 세웠으며,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에 요화당 안향각 취요헌 계월각 등 4개의 전각을 지었다.
1909년 일제가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더니,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가 철거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昌慶宮) 정문 홍화문(弘化門)
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므로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대문안쪽에 명당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옥천교(玉川橋)를 건너는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다. 1484년에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6년에 중건하였다.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386호 홍화문 안쪽 명정문(明政門) 사이에 있는 다리로, 성종 15년(1484)에 조성한 길이 9.9m, 폭 6.6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외행각(外行閣)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하였다.
명정문(明政門)
보물 제385호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지나 명정전으로 가는 출입문.
명정문(明政門)과 행각
명정전(明政殿)
국보 제226호
1616년에 재건된 명정전은 창경궁의 중심전각으로, 각 궁궐에 남아있는 정전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전문과 행각(보물 제385호)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로도 쓰였으며, 남쪽을 향하고 있는 다른 궁의 정전과는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문정전(文政殿)
임금이 신하들과 어전회의를 하던 편전으로, 편전이면서도 왕실의 혼전으로도 쓰였다. 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도 문정전이 혼전으로 쓰이던 것과 관련이 있다.
숭문당(崇文堂)
명정전의 후 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던 곳으로, 1830년에 세웠다. 영조임금의 친필 현판이 지금도 남아있다.
함인정(涵仁亭)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개방된 정자로서는 규모가 큰 편이며, 영조는 이곳에서 문무 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만나보기도 하였으며, 1833년에 세웠다.
주목(朱木)
경춘전(景春殿)
창경궁의 내전. 대비의 침전으로, 정조와 헌종이 탄생하였으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환경전(歡慶殿)
창경궁의 내전. 임금이 늘 거처하던 곳이며, 중종과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한곳.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후궁들의 처소가 밀집되어 있는 영역으로, 영춘헌과 집복헌도 후궁의 거처였다. 서로 붙어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1864년에 다시 세우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양화당(養和堂)
내명부의 어른들이 손님접대하던 장소로, 임진왜란, 이괄의 난에 화재가 났으며, 순조 30년(183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순조 33년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명전(通明殿)
보물 제818호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
창덕궁입구에서 보는 통명전(通明殿)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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