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대 궁궐
사적 제117호 경복궁(景福宮)
조선의 정궁으로 정연한 배치체계를 갖춘 궁궐로 북궐이라고도 한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세운궁궐로, 시경`의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의미를 따 이름을 지었다. 1394년(태조 3)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백악(白岳)과 삼각산(三角山)을 등지고 한성(漢城) 중심 좌우에 6조 관아(六曹官衙)가 있는 대로광장에 조영(造營)된 궁궐로서 중국의 고대궁궐을 만드는 법식인 하늘의 별자리를 본뜬 오성좌배치를 그대로 따랐다.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 1405년 창건한 제2궁궐로, 수도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 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270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왕조 제1의 정궁으로의 역할을 하였으며, 마지막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東闕)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1917년에 대조 전을 비롯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 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동궐의 후원은 한국전통 정원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것으로 평가되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아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적 제123호 창경궁(昌慶宮) 본래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었으나,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 다시 세웠으며,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에 요화당 난향각 취로정 계월각 등 4개의 전각을 지었다. 1909년 일제가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가 철거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으로 환원했다.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慶運宮)
500여 년 전, 조선 성종임금이 그의 형 월산 대군(1454~1488)에게 살림집으로 지어 준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다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이 되었다. 이후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궁궐로 삼았으며, 1907년에 고종이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사적 271호 경희궁지(慶熙宮址)
경희궁(慶熙宮) 복원사업 경희궁은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발굴 결과와 문헌 고증을 거쳐 경희궁내 각 전각을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 1987년에는 흥화문을, 1991년에는 숭전전 을, 자정전과 회랑은 1998년에, 태령전과 그 일곽은 2000년에 각각 경희궁내에 복원하였다.
다만 흥화문은 원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위치한 관계로 원위치에 옮길 수가 없어 서쪽으로 100여 m 이동하여 복원하였으며,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기는 하였으나. 대분분의 전각들은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