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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둘레길/문화유산

조선시대 성균관 과 반촌

by @산들바람 2020. 1. 11.

성균관(成均館)과 반촌(泮村)

서울역사박물관

2020.01.11일

 

성균관(成均館)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지금으로 보면 성균관은 국립대학이며, 유생은 국립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보면 된다. 반(泮)이란 나라의 학교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반궁(泮宮)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반수(泮水), 그 주변 마을이 반촌(泮村)이었다.

 

성균관과 반촌 표지

 

반인(泮人)들은 성균관의 문묘를 맡아 지키고, 유생들을 보살피는 역(役)에 종사했던 성균관 공노비로 반촌에 모여 살았다. 이번 전시는 성균관 유생과 공노비 반인들의 삶을 소재로 한 전시다.

 

조선의 성균관과 반촌 1

서울역사박물관의 기획전시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조선의 성균관과 반촌 2

조선의 최고학부인 성균관(成均館)은 '태학(太學), 반궁(泮宮), 현관(賢關), 근궁(芹宮), 수선지지(首善之地)등으로 불렸다.

 

조선의 성균관과 반촌 3
조선의 성균관과 반촌 4

법전의 성균관 관직도

종 9품에서~당상관 정 2품까지 경국대전 38명, 속대전 38명, 대전통편 38명의 관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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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나오는 성균관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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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에 정해진 품계의 따른 관인(官印)의 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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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성현을 배향하는 문묘, 의례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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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초상화와 대성전

 

성균관 대성전 문묘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문묘는 공자외 성현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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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인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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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은 전국에서 응시자 중 합격한 200명의 수재들 대부분은 성균관에서 기숙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닦았는데, 식사, 학용품 등은 국가에서 지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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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기본정전인 사서오경

이 많은 책을 통달해야 하니 선비가 되는 길은 참 험하기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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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으로, 이는 관료가 되는 것을 말하며, 학문을 닦고 시험에 응시하는 생활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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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은 일상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매달 보는 월강(月講)등이 있었으며, 시험결과는 연말에 합산되어 우수한 성적을 올린 자는 관직에 오르기도 하고, 문과시험의 초시가 면제되는 혜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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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의 학습은 사서오경을 읽고 외우는 공부등, 학업의 양과 범위는 방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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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량의 학습독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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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오경등 학습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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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과거에 합격하면 방방의(防榜儀)라는 축하행사가 열렸다. 합격증서인 홍패를 수여하고, 임금으로부터 술과 과일을 비롯 어사화를 쓰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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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양반 중 소과(小科)에 합격한 200명의 수재들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학 신진관료가 되기 위해 학문을 닦았다. 문과(文科)의 대과(大科)라는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성균관을 졸업하는 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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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건물관리. 기숙사와 식당의 일을 전담하며, 성균관의 재정과 경비를 담당하는 실무자인 반인(泮人)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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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泮人)은 고려후기 유학자 안향이 개성에 있던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의 후예였다.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고려수도인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되자 이들 역시 한양으로 이주하여 성균관에 입역 하면서 살았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문묘를 받들고, 유생을 키운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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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泮人)들은 순번에 따라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그 외 반인들은 반촌(泮村)에 살면서, 주로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올라온 지방유생, 관료가 된 지방양반의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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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촌(泮村)은 반수(泮水)의 다리를 기준으로 동반촌, 서반촌으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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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촌(泮村)은 지금의 대학가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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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생들의 여가시간을 보낸 장소였던 반촌(泮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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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년 겨울 이승훈, 정약용 등이 과거를 핑계로 반촌에서 연소배들을 끌어들여 설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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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반(泮) 주인에게 노력의 보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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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생들의 아지트 반촌(泮村) 자료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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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들어 반인들은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성균관의 노비라기보다는 상인의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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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서 상인으로 변모한 반인(泮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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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주변의 엣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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